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잔병치레 없이 80평생을 건강히 일하시며 즐겁게 사셨다고 한다. 70이 다 되시도록 평생 하시던 채소 농사도 (비닐하우스를 임대하여 일하는 분들을 고용하고 채소를 길러 파셨고 나는 이를 “상업”이라는 뜻도 모르는 직업으로 알고 커왔다) 거뜬히 해내신 분이셨다. 나는 어려서 부터 특히나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터라, 할아버지가 갖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도 훨씬 크고 가슴아린 추억이었다.


2002년 추석즈음에 찍어드린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마련했다.

그러던 2004년 5월, 폐암 1기 판정을 받으시고, 그나마 초기에 찾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령임에도 수술을 통해 치료가능하다는 말에 그 힘드신 수술을 받으셨다. 마지막으로 조직검사를 통해 폐암임을 확인하던 그 때는, 물론 전부터 폐암 가능성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정말 뭐라 말하기 힘든 가슴아픔과 한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셔서 입에는 호흡기를 물고 처음 글로 쓰신 말이… “배고프다”, “나는 괜찮다” 였는데, 웃는 얼굴로 그걸 보여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큰 바다”라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 오랜 수술시간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할머니 옆에서 걱정을 덜어드리는 일 뿐이었다.

수술을 받으시고 (폐의 3/4를 떼어내셨다) 숨가빠하시면서도 이젠 다 나았으니까 걱정말라던 할아버지께 큰 손주 며느리감을 소개시켜드리고, “이쁘다”를 연발하시던 할아버지가 비록 숨쉬기 힘드실지라도 오래오래 사셔서 증손주도 보실줄 알았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는 2005년 6월 즈음,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시던 할아버지께 두 번째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주치의가 제거한줄 알았던 암세포가 다시 발견되어 뼈와 다른 조직으로 전이되었고 더 이상 수술은 불가능하며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는거 외에는 손 쓸 수 없다는 소견을 들었다. 할아버지 당신께서는 다 나으셨다고 좋아하시지만, 이 말을 전해들은 가족들은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체 숨죽여 울어야했다.

나는 이런 할아버지를 위해서, 돌아가시기 전에 두 손주중 하나라도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예정보다 다소 무리하게 결혼을 앞당겨 8월 땡볕에 결혼식을 잡았다. 이런 와중에 할아버지의 병세는 나날이 안좋아져 가고, 결혼식이 먼저냐 할아버지 눈감으시는 날이 먼저냐를 항상 걱정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평생의 한번뿐인 결혼식을 이러한 이유로 멋있고 찬란하게 치르지 못해 나는 내 아내에게 평생의 미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할아버지도 당신의 상태에 대해서 아시게 되었고, 우려했던것과는 달리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래, 살만큼 살았다. 죽기전에 너 결혼하는거나 봐야지”.

교회 호스피스 관련일을 보셨던 고모를 통해 경기도 용인에 샘물호스피스 라는 말기암 환자 요양소에서 종교의 힘을 빌어 요양하시다가, 결혼식날 진통제에 의지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처음 부터 끝까지 웃으시며 내 결혼식을 보셨다. 지금와서 생각해도 그 때 할아버지를 모시고 결혼식을 하게된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고, 그로 인해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어서 내 슬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던것 같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처가에서 마련해주신 이바지음식을 들고 요양소로 찾아가 새로운 가족을 정식으로 인사시켜드리고, “떡이 참 맛있다.” 하시며 평소보다도 더 맛있게 음식을 드셨다. 할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사진도 찍고…

할아버지는 2005년 9월 신혼여행 후 인사드린 그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평생을 함께 아웅다웅 살아오신 할머니와 비상등을 켜고 고속도로 갓길로 달려가신 아버지를 옆에 두시고 큰 힘듦없이 예배하는 시간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동현아, 할아버지 방금전에 돌아가셨다”라는 울먹임섞인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평생을 소리내어 울어본적없는 내 가슴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평생을 시집살이하며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유일하게 시집에서 어머니를 다독여주셨던 할아버지의 소식에 어머니와 서로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나를 “이럴때 장남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며 다독여주는 아내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동생덕에 친척들께 일일이 연락드리고, 영정사진을 마련하고, 필요한 준비를 해서 미리 아버지께서 마련해두신 보라매 병원 영안실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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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장례식 기간중에 장인어른 기일이 끼어있어서, 여기에 참석하지 못해 처가식구들께는 죄송하지만, 장례식 내내 무릎이 까지도록 문상을 받고, 새벽녘에 자고 있는 우리를 깨워서까지 문상해 주었던 친구들과 자신의 부모일 처럼 장례를 도와주신 여러 친지들과 시집오자마자 한복 대신 소복을 입고 장례를 치른 아내덕에 장례식을 무사히 치르고 할아버지 고향인 경북 군위 선산에 묘를 마련했다.


큰 손주 신혼여행에서 돌아올때까지 힘든 시간 버텨주셔서 마지막 효를 다할 수 있게 해주신 할아버지께 감사드리고, 30여년만에 큰 행사인 결혼식과 장례를 모두 잘 치르낸 가족들께 감사드리고, 할아버지 장례식을 잘 끝낼 수 있게 이해해 주신 처가 가족들께도 감사드리고, 신혼생활을 장례식부터 치르게 한 아내에게 감사한다.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즐겁게 지내시길 바라고, 가끔은 우리 어떻게 사는지도 봐주세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 핸드폰카메라, 2005

3 thoughts on “할아버지”

  1. 할아버지 돌아가시던날 냉정하게 대한 나의 태도가 오빠에게 참 미안했었어요.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는데.. 미안했어요.
    그렇게 큰일 겪고도 담담히 잘 치뤄낸 오빠가 자랑스럽고 고마워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면서 살아요.
    사랑합니다.

  2. 항상 인생의 중요한 순간엔
    나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져 있지를 않다…

    아이러니이지…

    가장 남기고 싶을 순간일지도 모르는 건데 말이지…

    헌데…

    그런게 진실일지도 몰라…

    사진이 없는 순간이나
    말 혹은 글로써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순간이
    진짜라는 거….

    너의 결혼식에도
    너의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너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있지 못했고…

    앞으로도 많은 중요한 날들엔 아마 그러겠지..

    가장 할 말이 많은 그 순간에…
    니가 찍은 사진은 없는게야…
    그런게야…

  3. 조근조근 써내려간 듯한 오빠의 글 속에서 30여년 간의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겐 저와 저의 할머니가 오빠와 할아버지의 추억만큼 소중한 추억인데요.. 할머니가 오래 누워계셨는데 살아계실때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요.
    저 어린시절 자라는 동안 쭈욱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써서 잠잘때 항상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다리는 할머니 허리에 걸치고 잤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아빠와 잠잤던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요즘 딸애가 잘 때 너무 사랑스러워서 ‘엄마가 옆에 있다고 안심하고 푹 자라’는 마음에서 그냥 옆에서 손을 꼬옥 잡아주곤 하는데요, 예전에 할머니가 저에게 그런 마음이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빠의 글을 읽고 저도 할머니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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